설교학 강의

설교주제의 균형성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설교

한국교회 설교 주제의 편향성


정창균

들어가는 말

설교는 성경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정당한 기독교 설교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설교는 성경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말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첫째는 설교는 특정의 성경말씀을 본문으로 삼고 그 본문에 근거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예 본문이 없는 설교나 혹은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를 본문으로 삼아서 행해지는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가장 위험한 설교는 본문을 말하지 않는 설교이다. 우리가 설교하기 전에 본문을 낭독하는 것은 그 본문을 말하겠다는 공적인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일리가 있는 신앙적인 강좌가 아니라, 지금 읽은 그 본문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앞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근래의 한국교회의 설교는 본문을 이탈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설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의 공통된 염려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는 한 사람의 설교자가 수행하는 많은 설교들이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내용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설교들이 성경의 주제들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편의 설교 안에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의미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할 때 그 한편의 설교 안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행하는 모든 설교들의 경향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근래에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설교,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설교, 청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설교, 혹은 지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 등이 강조되어 오고 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설교자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설교의 주제들과 선호하는 설교의 주제들이 형성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옥설교나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 헌신을 요구하는 설교,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는 설교, 청중에게 권위적으로 촉구하는 내용의 설교 등은 해서는 안되는 설교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의미가 매번 수행되는 한편의 설교가 본문을 말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두 번째 의미는 한 설교자가 행하는 많은 설교들이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의 내용 혹은 주제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첫째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설교의 본문 이탈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둘째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설교주제의 편향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두 번째 문제, 곧 설교 주제의 편향성의 관점에서 한국교회 설교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설교주제의 편향성이란 무엇인가?

설교주제의 편향성이란 설교자가 특정의 의도와 목적으로 어떤 주제는 피하고 어떤 주제는 선호하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그가 행하는 설교들이 전체적으로 특정의 내용이나 주제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위험한 설교가 위에서 말한 본문을 말하지 않는 본문이탈 설교라면, 그 다음으로 위험한 설교는 성경의 내용 혹은 주제를 편향적으로 선포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특정의 주제에 집착하는 편향적인 설교는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와 성경 혹은 그 주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갖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왜곡된 입장을 취하게 하여 신앙과 생활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근래에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는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등 듣기 좋고, 편안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하나님으로 설교하는 것이 주를 이루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공의의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은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거나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분이라는 말로 해석되곤 한다. 그리하여 진노를 통하여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말을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짓을 하든지 용납이 되고, 어떤 모습이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을 받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사랑의 본질을 왜곡하게 된다. 그 결과로 은연중에 하나님은 마치 인자하고 너그러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되거나 최소한 편향된 이미지를 갖게 되는 현상이 빚어지게 된다.

실제로 필자는 신학생들이 모인 그룹과 성도들이 모인 그룹에서 각각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러울까, 사랑스럽지 않을까?”를 물어보았다. 대다수의 신학생들과 성도들의 즉각적인 대답은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렇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당연히 사랑스럽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어찌할 수 없어서 저절로 이루어진 기계적인 일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사필귀정인 당연한 결과라는 말인가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성경의 이곳저곳, 특히 선지서 전반에 걸쳐서 선포되고 있는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당연히 사랑스럽다는 것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물으며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절로 사랑스럽기는커녕 저주의 심판을 내려야 할 반역자였다는 사실, 그런데도 그런 인간을 자기 아들을 죽이는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사랑하시기로 의지적인 작정을 하셔서 드디어 이루어진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사랑이 표현되는 구체적인 양상이 어떻게 다양한지를 확인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당연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메시지만을 편향되게 선포해온 설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2. 설교주제의 편향성의 요인

1) 설교자의 신학적 신앙적 취향 혹은 목회적 필요에 대한 집착
설교의 주제가 편향적으로 선정되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설교자의 신학적 취향과 신앙적 기호에 집착하여 설교를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의 주제들은 편향성을 갖게 된다. 설교자는 하나님 나라, 언약, 구속사 등 신학적 주제나 혹은 전도, 헌신, 기도 등 설교자가 자신이 있거나 혹은 심취해 있는 신앙의 주제들을 설교하기에 좋은 본문들을 위주로 설교를 수행하게 된다. 특정의 주제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해지면, 어떤 본문을 내세우든지 결국 그 주제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의 설교를 수행하게 된다. 이런 경우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결국은 그 말씀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설교의 편향성은 이렇게 한두 주제에 편중하여 다른 주제들을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주제에 대하여도 성경이 그 주제를 제시하는 다양한 측면들을 파악하여 균형 있게 그 주제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설교가 편향성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도를 주제로 설교하면서 언제나 기도를 설교할 때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혹은 기도를 하면 응답의 복을 받는다는 등 성경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내용 가운데 설교자의 취향에 맞는 일부 측면만을 강조할 뿐, 기도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다양한 측면들을 균형 있게 드러내주는 설교를 하지 않음으로써 편향적인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기도를 주제로 설교하면 언제나 그 말씀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는 언제나 우리에게 잘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야!” 라는 식이다.

2) 청중의 필요 충족에 대한 오해와 강박관념
설교의 주제가 편향성을 갖게 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은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된다는 사실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설교는 청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교를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강조되어온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설교자는 청중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의 필요에 무관심하면, 그는 자기의 필요를 따라 설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말이 청중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청중의 필요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필요(Expressed Need)와 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필요(Actual Need)이다. 양자는 서로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다를 수 있으며, 심지어 대립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맹장수술 후 통증을 견딜 수 없어서 진통제 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치는 환자가 있을 때 진통제 주사는 그의 요구된 필요(Expressed Need)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사라면 아무도 그에게 진통제 주사를 처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일어나서 복도를 걷는 운동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장이 유착하는 현상이 일어나 다시 수술을 해야 된다고 등을 치며 운동을 재촉한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일어나 걷는 것이 그의 실제적 필요(Actual Need)이다. 그에게는 수술로 흐트러진 창자들이 속히 제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전문가인 의사는 환자가 요구한 필요가 아니라, 그 환자에게 실제로 필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려 한다.

설교자는 언제나 청중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양상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정당한 말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설교를 청중의 필요로부터, 또는 청중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말은 그 내용에 분명한 한계를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설교가 청중의 현상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실제의 필요에 눈 감아버리고, 요구된 필요를 충족하기에 급급하다보면 설교는 청중의 독재상태(dictatorship of the audience)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설교는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청중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설교 주제가 균형을 잃고 편향성을 띄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설교가 청중의 요구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얽매이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가 바로 설교자의 영적통찰력과 양심 있는 용기, 그리고 교인들을 향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다. 무엇이 요구된 필요이고 무엇이 실제의 필요인가를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과 이 양자가 대립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 청중의 실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설교를 수행하는 양심 있는 용기가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용기는 목회자로서 갖는 교인들을 향한 깊은 관심과 진정한 애정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관심과 애정이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을 설교하는 용기를 만들어낸다.

3)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춘 금기시 되는 설교의 주제 이 단락을 더 보완할 것!
소위 부와 건강, 그리고 성공의 복음이라 불리는 축복 중심의 기복적 설교가 극성을 부리며 강단 설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된 것은, 청중의 기복적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설교철학에 입각하여 설교를 수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교에서는 고난이나 신앙의 성숙과 관련된 주제는 배제되고 복, 형통, 평안, 치유, 성공과 같은 주제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위와 같은 청중의 욕구 충족을 근거로 한 설교주제의 편향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금기시되는 설교의 주제들을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오늘 날과 같이 삶이 고달픈 시대에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하는 것은 사랑과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이며, 그러므로 그들을 더 피곤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 팽배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나 지옥에 대한 설교, 헌신을 도전하는 설교 등 교인들이 심적인 부담을 갖게 하는 주제들은 금기시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절대권위를 절대 거부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본질로 하는 시대라는 인식을 근거로 가능하면 권위를 전제로 하는 메시지는 삼가야 한다는 주장이 보편화 되고 있다. 그리하여 높고 거룩하시며 초월적이고 심판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 보다는 우리의 친구와 같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내 곁에 계시는 이웃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경향이 형성되게 되었다.

3. 설교주제의 편향성에 대한 대응책

1) 금기시 되는 설교의 주제들을 과감하게 설교하기

(1) 금기시 되는 주제들을 설교해야 하는 정당성
물론 교인들은 강단으로부터 위로와 소망과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옥에 대한 말씀과 헌신을 도전하는 말씀과 죄와 회개에 대한 말씀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우신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말씀이 그 자체로 그들에게 부담이 되거나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실, 교인들은 지옥을 말하는 설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설교를 지옥같이 하는 것을 싫어한다. 청중이 싫어한다고 있는 지옥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있는 지옥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헌신을 메시지로 하는 설교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설교를 마치 강도 만나 강탈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설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협박과 공갈을 당하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쏟아내는 설교를 싫어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깊이 깨닫고 그분 앞에서 통곡하며 회개할 때 비로소 가슴 깊은 곳,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깊은 평안과 담대함을 드디어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도 자주 확인되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마침내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회개할 때, 그의 마음은 깊은 해방감과, 담대함, 그리고 영혼의 평안함을 드디어 회복하였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매우 예리하고 정당한 것이다. “교회의 신학적이고 절대적인 명제들이 더 이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들을 표현하는 예전 방식들이 갈수록 더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역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던 예전 방식이 점점 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독백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기관에서 청년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 다수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거나 떠나려 하는 이유를, 교회가 마땅히 자기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씀을 하지 않고 자기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 지나치게 자기들의 눈치를 보는 설교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보고가 나오기도 하였다.

신앙의 양심은 죄의식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죄와 회개의 메시지는 감추어버리고,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니 괜찮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니 담대하라고 외쳐대는 설교가 주는 것은 위장된 거짓 평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직한 교인들은 머지않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설교만 들은 것을 후회하며, 그런 설교자를 만나서 속아 산 것을 불행해 하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준엄하며, 우리는 범법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유야무야 얼버무리거나 덮어주는 것은 사실은 친절하거나 사려 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잔인한 것이라는 마이클 호튼의 주장이야말로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초월성과 거룩성을 강조하거나,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설교하면 현대 교인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저들의 저항을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시는 분,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위로의 하나님으로만 설교하여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안심시키는 데에 주력하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속는 어리석은 시도일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왜곡과 실용주의에의 편승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는 결과적으로 볼 때 교인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도 실패하고 있음이 여러 방면에서 입증되고 있다.

절대권위를 절대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시대이므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피하는 것이 흐름에 예민한 것이며, 이 시대를 사는 청중에 대한 민감한 대처라는 주장은 반쪽만 맞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초월하는 “권위 있는 존재”를 갈급해 한다. 최소한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그 초월적 절대적 권위의 확인을 갈급해하는 이율배반적 욕구를 이 시대는 품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를 버리고 천주교나 혹은 희랍 정교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우심과 초월성과 엄위하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설교자에게는 특정의 주제를 설교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제를 어떻게, 어떤 심정으로 설교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는 말은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 는 한 마디이다(딤후4:2). 이것은 하나님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내세운 엄중한 명령이면서(1절),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6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놓는 마지막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사도가 그렇게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세대가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3절). 이 세대가 부담스러워하는 말씀과, 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사도는 펴고 있는 것이다.

(2) 금기시 되는 주제들을 설교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

용기

오늘 날의 설교자에게는 청중의 “요구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금기시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과감하게 설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니엘 도리아니(Daniel M. Doriani)는 매주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매주 비겁하게 침묵하고 싶은 유혹이 공격을 해오기 때문에 설교자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용기,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다루는 용기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용기의 근원은 진정한 믿음, 성경의 하나님,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신 분에 대한 신뢰와 헌신이라고 주장한다.

지혜

금기시 되는 주제를 과감하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용기와 함께 지혜가 필요하다. 특히 청중이 듣기를 꺼릴만한 주제나 부담스러워할 만한 주제를 다루는 설교를 할 때는 매우 사려 깊은 방식으로 그 주제를 제시하면서 설교를 이끌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주제로 설교할 때 그것이 단순히 분노의 표출이나 위협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빙자한 설교자의 청중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나 혈기의 표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에도 그것이 소망의 복음과 균형을 잃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은 결코 심판 자체로만 끝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이 용기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단순히 수사학적 전략이나,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기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청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청중에 대한 설교자의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설교자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오늘 날 청중은 어떤 주제를 듣고 싶어 하고 혹은 듣기 싫어하는가에 있지 않고, 그들이 들어야만 하는 주제들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있다.

2) 한 주제에 대한 시리즈 설교의 시행

3) 성경 각 책들에 대한 균형 있는 설교

나가는 말

사실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들은 말씀에 집착하여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재미있는 설교, 편안한 설교, 축복이 넘치는 설교를 지향해왔다. 교회에 대한 강조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주로 일과 봉사 등을 강조하며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 등 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설교도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등에 초점을 맞추고 대신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등의 주제는 상대적으로 설교에서 외면해온 경향이 있다.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되거나, 청중이 기대하거나 설교자가 선호하는 주제에 편향된 설교로 치우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매 설교는 낭독된 성경 본문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모든 설교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의 내용과 주제들을 균형 있게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창균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설교자하우스 대표
정창균

Latest posts by 정창균 (see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