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

본문 중심성의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설교

한국교회 설교의 본문이탈 현상

정창균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면 교회는 흥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가 병들었으며, 병든 교회는 그 사회가 암흑의 시대로 접어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얻는 중요한 통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P. T. Forsyth가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하였거나 설교와 함께 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현상이 설교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첫째는 성경 본문이 말씀하는 진리가 선포되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진리가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강단의 설교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인들의 삶의 현장을 향하여 효과적으로 소통이 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듣는 교인들을 아무리 흥분시키고 그들의 심령을 사로잡을지라도, 성경의 진리를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 설교는 “힘 있게 선포되는 설교”는 아니다. 동시에, 아무리 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담고 소리쳐 외칠지라도, 그 내용이 교인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설교도 “힘 있게 선포되는 설교”는 아니다. 앞의 것은 감언이설이고, 위의 것은 무용지물이다. 여기서는 기독교를 흥하게 하는 힘 있게 선포되는 설교의 필수요소 가운데 하나인 성경말씀의 선포 즉,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설교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1. 현대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와 설교의 본문 이탈 현상

설교는 본문말씀(Text)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설교의 본질에 입각하여 한국교회 설교 현실을 살펴볼 때 근래의 한국교회 설교가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경향은 본문에 충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disuse), 성경을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misuse), 성경을 남용(abuse)하기도 한다. 스마트(James D. Smart)는 현대 교회가 예배와 설교, 의식 등에서 성경을 소홀히 여기고 성경을 배제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을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성경의 이상한 침묵(The Strange Silence of the Text in the Church)”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한국교회의 설교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상을 James D. Smart가 그의 책 제목에서 사용한 어구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설교에서의 본문의 이상한 침묵(The Strange Silence of the Text in the preaching)”이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현상을 설교의 “본문 이탈”이라는 말로 총칭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단정은 통계적 방법이나 실제 사례의 제시,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의 제시, 그리고 그것을 입증할 과학적인 방법 등을 통하여 논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자의 이러한 진단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이라고 비판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설교현장에 있는 설교자나 교인들의 다수가 한국교회의 설교는 본문 이탈 현상이 심각하다는 판단에 대하여 크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례로, 설교를 잘하는 큰 교회 목사님으로 잘 알려져 있는 K 목사는 2004년 5월 2일부터 9월 19일까지 5개월 동안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에 나오는 덕목들을 중심으로 “무엇보다 귀한 자녀”라는 제목의 연속설교를 15회에 걸쳐서 전했다. 이 연속 설교의 전체 요지는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에 나오는 여러 덕목들에 따라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이었다. 그 기도문에서 맥아더 장군은 “용기와, 정직한 패배에 대한 당당함, 겸손, 온유, 강인한 정신, 긍휼, 너그러움, 깨끗함, 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소박함”을 가진 자녀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이 그 설교자의 설교내용이었다. 이 설교들에서 K 목사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본문을 한두 구절씩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K 목사가 연속설교를 위한 기본 텍스트로 삼았던 것은 결국 성경이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이었다. 그는 아예 그의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요즘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텍스트로 삼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과연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명도 때문인지 15회 연속 설교는 한국교회 여러 목회자들이 인용하거나 참고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여러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한국교회 안에 널리 소개되고 있으며, 그 설교 내용은 2004년 말에「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 설교자는 “내가 생각하는 설교”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설교관을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한 적이 있다. 자신의 설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진술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이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최소한 2가지 점에서 설교에 대한 비평을 들어왔던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첫째는 설교에서 “성경 본문은 이야기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에서 같은 이야기 특히 같은 예화를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의 설교에서는 성경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과, 반면에 같은 설교를(특히 같은 예화)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는 불평이 있어왔는데,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내가 생각하는 설교”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다. 첫 번째 문제, 즉 그의 설교에서는 성경본문을 들을 수 없다는 불평을 염두에 둔 듯한 진술에서 그는 공공연하게 “설교는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나는 설교를 성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 시간에 택하는 본문은 대개 설명 없이 이미 교인들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고 있는 본문을 주로 택한다. 나는 성경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강의하는 것은 설교시간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킬 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설교하려고 하는 것은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본문의 말씀이 지금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이다. ‘하나님께서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분의 설교들에서는 본문에 대한 언급이 4줄 이상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위 사례는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이 본문을 제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단적으로 표출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강단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선포하지 않고 있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은 급기야 성경이 아닌 일반 경건서적이나 종교적인 고전을 기본 텍스트로 삼는 설교로 나아가고 있다. 어떤 설교자들에게는 성경이 아니라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설교 본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설교자들에게는 영화가 설교의 본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설교의 본문 이탈 곧 설교에서 본문의 침묵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흐르게 한다. 설교자들은 언제나 분주하고 언제나 피로에 지쳐있도록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흐르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congregation)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된다. James D. Smart 가 지적하는 대로, 다양한 방식과 경로로 성경이 교회에서 무시당하고, 교회 안에는 성경의 이상한 침묵(Strange Silence of the Bible) 이 보편화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결국 하나님의 부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교회의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문 이탈로 초래되는 설교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이다.

 2. 본문 이탈의 양상

설교에서 본문이 침묵하고 설교는 본문을 이탈하는 구체적인 방식도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가 설교에서 본문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경우이다(disuse). 본문은 낭독용 혹은 도약대(jumping board)로만 사용하고 설교의 내용은 본문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채움으로서 설교에서 본문이 사라지는 경우이다. 전형적인 전통적 3대지 설교나 제목설교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아예 본문이 없는 설교가 등장하기도 한다. 앞에서 제시한 서울의 대형 교회의 K 목사의 설교가 이러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둘째는 본문을 오용(misuse)하는 경우이다. 설교자의 주해나 주석의 미숙, 본문의 핵심의미 파악에 실패함으로써 빚어지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시작하였으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말씀으로부터 이탈해가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 연구에 있어서 설교자의 성실설과 정확성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어느 경우에는 교묘한 방식이나 억지적인 방법으로 본문을 이탈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히 본문의 어떤 단어나 어구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그래서 언뜻 보면 본문에 근거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본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나 개념으로 본문의 단어나 어구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본문의 남용(abuse)이다. 설교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본문이 말하도록 본문을 강요하는 경우를 말한다. 지나친 알레고리 해석이나, 지나친 심리적 해석이 본문의 남용으로 설교가 본문을 이탈하는 구체적인 수단이 되곤 한다. 설교에서 본문의 남용이 이루어지는 경우, 본문은 다만 설교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는 도구로만 사용될 뿐, 본문 자신의 말은 억압을 받고 제제를 받게 된다. 이 경우에 가장 극심한 “주입하기(indoctrination)”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설교자는 더 이상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는(exegesis)자가 아니라 본문에 자신의 생각을 부여하는(eisegesis) 자가 된다. 그렇게 하여 결국 설교에서 본문은 침묵을 강요받게 된다. “설교는 ‘강요’가 아니라, ‘강해’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 의미를 주입하려고 할 때, 설교자는 크고 작은 ‘본문 조작’ (manipulation)을 행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본문의 왜곡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본문에 대한 반역(betrayal)을 의미한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반역은 그 본문의 음성을 듣고자 거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청중에 대한 반역이요, 나아가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James D. Smart의 지적대로, 성경을 주로 사사로운 용도를 위한 신앙적 문헌으로 만들어버린 채 성경이 요구하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중대한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너무 개인주의적인 해석에 빠져버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요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게 된다.

3. 본문 이탈의 원인

1) 세속 정치와 사회의 흐름에의 편승
1960년대 이후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한국사회의 최대의 관심은 경제 성장이었다. 한국정치와 사회는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인권 탄압과 노동 착취 등의 부작용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흐름에 편승하여 이 시대의 교회가 심혈을 기울인 것도 곧 교회의 성장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랄 정도로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이 강단의 설교였다. 교회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는 자연히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설교에 집착하게 되었다. 축복 중심의 기복적 설교가 이 시기에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소위 부와 건강, 그리고 성공의 복음이 강단 설교의 주를 이루는 경향을 띄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샤마니즘이라는 문화적 배경 때문에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경향을 띨 위험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 설교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더욱 쉽게 기복적인 성격의 설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는 본문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그로부터 얻은 메시지를 선포하기 보다는 청중이나 설교자의 기복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로 나아가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즉, 설교의 본문 이탈과 설교에서의 본문의 침묵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양적 성장을 구가하게 된 한국교회는 8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양적 성장의 침체기로 돌아섰다. 물론 이 시기에 교회의 질적 성장을 강조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흐름은 침체되고 있는 양적성장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교회로 나아오게 하거나 최소한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흐름은 여전히 설교의 본문 이탈 혹은 설교에서의 본문의 침묵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설교는 더욱 축복과 성장 그리고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어 청중의 필요와 부와 건강의 복음 그리고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의 철학에 사로잡힌 채 설교의 본문이탈을 극대화하며 오늘에 이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내려지는 결론은 교회가 수적 성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 교회의 성장기이든지 침체기이든지 설교는 공통적으로 본문 말씀의 충실한 선포로부터 이탈하여 청중의 요구와 타협하거나, 기복적 축복의 메시지에 치중하거나 하여 소위 부와 건강과 성공의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2) 왜곡된 청중의 필요 충족에 대한 집착
설교의 본문 이탈 현상이 보편화된 근저에는 설교자의 설교의 기능에 대한 잘못된 철학과 설교의 대상인 회중(congregation)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설교의 기능에 대한 편협된 이해이다. 물론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정당한 주장이다. 설교자는 청중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의 필요에 무관심하면, 그는 자기의 필요를 따라 설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말이 청중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청중의 필요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필요(Expressed Need)가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필요(Actual Need)가 있다. 그리고 양자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맹장수술 후 통증을 견딜 수 없어서 진통제 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치는 환자가 있을 때, 진정한 의사라면 아무도 그에게 진통제 주사를 처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일어나서 복도를 걷는 운동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장유착 현상이 일어나 다시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등을 치며 운동을 재촉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중의 필요로부터, 또는 청중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말은 그 내용에 분명한 한계를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청중의 현상학적 요구가 언제나 설교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기복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축복 위주의 설교를 삼가야 한다. 둘째는 설교의 대상인 회중에 대한 왜곡된 태도이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교인관이 고객관을 근거로 형성됨으로 말미암은 데서 오는 귀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 날 목회현장에서는 전통적인 교회관이 현대의 기업관으로 대체되고, 목회자관은 최고경영자 곧 CEO관으로 대체되고, 교인관은 고객관으로 대체되는 대변질이 일어나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감지할 수 있다. 교인들을 최대의 서비스로 편안히 모셔야 되는 고객관에 입각하여 대하게 되면 설교에서는 청중의 독재(Audience’s Dictatorship) 현상이 초래되고, 설교는 청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설교에서는 필연적으로 본문의 침묵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

3) 부담을 주지 않는 재미있는 설교 추구
우리의 설교가 쉽고 재미있는 설교, 편안하고 부담이 없는 설교, 실용성 있는 설교라야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위하여 스스럼없이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로 가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도 오늘 날 설교 강단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설교에 대한 교인들의 요구와 그에 부응하려는 설교자들의 반응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설교는 점점 오락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청중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설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락 도구로 전락하고, 엔터테인먼트 수단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빚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75세 된 노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OO 목사님의 설교가 하도 재미있어서 TV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경 말씀을 확실하게 전해주는 다른 분의 설교를 듣고서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그 설교들은 재미는 있는데 듣고 나서 남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확실히 전해주는 설교는 듣고 나서 마음에 남는 게 있어요.“ 물론 듣기에 재미있는 설교와 마음에 남는 게 있는 설교가 언제나 대립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미에 우선을 두는 설교는 남는 게 없는 설교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제라도 청중을 재미있게 해주려는 오락성이 본문이 요구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대체해버릴 수 있다.

4) “쉬운 설교에 대한 오해
물론 설교는 쉬워야 한다. 그러나 쉬운 설교란 내용이 없어서 긴장감을 주지 않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오락성으로 채워진 설교를 말하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본문의 말씀을 생략하고, 재미있거나 심금을 울리는 다른 이야기나 행사로 대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KBS TV의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이나 다른 예능 프로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을 웃음을 자아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긍정의 힘이 본문 역할을 하는 자기 최면성 심리작용을 부추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밑도 끝도 없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쏟아내어 아멘을 유발하며 카타르시스를 유발하여 속을 후련하게 해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모두 본문 이탈 현상으로 나아갈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교자도 청중도 명심해야 한다. 쉬운 설교란 내용이 없어서 쉬운 것이 아니라, 심오한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 날 청중들의 언어로, 그리고 설득력 있는 전개로 잘 전달되게 하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쉬운 설교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 방식의 문제임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설교는 본문의 말씀과 청중을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5)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
설교의 본문 이탈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은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설교자의 의식이다. 이것은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이다.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그 안에 여러 가지 근거를 담고 있다. 목회에는 말씀 외에 다양한 변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말씀으로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말씀만 가지고는 교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고, 교인들이 모이지 않는다고도 한다. 혹은 설교는 그래도 남 못지않게 하는데, 목회가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말씀에 집착하는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고도 한다. 논리를 내세운 것이건, 자신의 경험을 내세운 것이건, 혹은 문화적, 사회적 현실 인식을 근거로 한 것이건, 그러한 명분의 근저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현실적으로는 핍박받는 나그네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말씀이 최고라고 강조한다. 거듭나게 된 것도, 영혼을 깨끗하게 한 것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된 이 땅에서의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도, 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사도는 단언한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으며 세세토록 있으며, 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강조한다(베드로전서 1장). 말씀만으로는 안 되니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서 이런 저런 다른 것들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에 놓고 집착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사도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는 말은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 는 한 마디였다(디모데후서4:1-4절). 이것은 하나님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내세운 엄중한 명령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6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놓는 마지막 간곡한 부탁이었다. 사도가 그렇게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세대가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고, 사욕을 채워줄 거짓 선생들을 찾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3절). 이 세대가 부담스러워하고, 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사도는 펴고 있는 것이다. 청중이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말씀 준비와 열성이 충족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 자체가 충족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그의 설교에서는 자연히 본문 말씀이 침묵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수련회나 캠프를 준비하느라 쩔쩔매는 사역자들을 보며 그 열정에 고마운 마음과 그 힘들어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나를 사로잡곤 한다.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재미있고 기발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들이 때로는 너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초대형교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교회도 아이들이 교회 밖 어디에선가 누리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교회 안에서 제공하여 아이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인력으로도 불가능하다. 단순히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이 굳이 교회 수련회에 올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많은 아이들이 재미는 자기들만 통하는 다른 곳에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교육부서 사역을 하는 제자들에게 간간이 권면하는 것이 있다. 담임 목사님과 진지하게 말씀을 나누어 당분간 부서에 아이들이 상당수 감소한다 할지라도 교육부서의 수련회에서 모든 다른 오락성 프로그램을 없애버리고 성경수련회 혹은 성경 캠프로 운영하는 모험을 시도해보라는 제안이다. 어차피 아이들의 기대나 현실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게임, 오락, 체험 등은 다른 곳에서 즐기라고 하고, 교회 수련회에서는 2-3일 동안 오직 성경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나누고 발표하고 그리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담당 교역자가 기도준비와 교재준비 그리고 말씀 준비를 치열하게 할 것을 전제로 한다. 시도해보니 아이들이 의외로 좋아하고 은혜를 받는다는 보고를 간혹 듣곤 한다. 각 교육부서에서 “다니엘서 성경 수련회”“요한복음 성경캠프”등으로 이름 붙인 수련회나 캠프로 여름 행사를 바꾸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교회들도 이제는 앞에 “특별”자를 붙인 무슨 무슨 집회나 이벤트보다는 차라리 “출애굽기 성경집회” “하박국서 성경 집회”등으로 이름 붙여진 성경집회(Bible Conference)로 교회 행사들을 진행하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이벤트 준비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하여 쏟는 그 열정과 그 헌신과 그 수고를 말씀 연구와 준비와 실천에 쏟을 수만 있다면 이런 캠프나 집회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진리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를 살리는 “살아 있고 세세토록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6) 본문에 대한 집착 부족
설교가 본문에 집착한다는 말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청중이 이해하게 하고, 본문이 의도하는 것을 청중이 행하게 하려는 데 집중하는 설교를 말한다. 설교가 본문에 집착하지 않게 된 데는 본문과 심도 있게 씨름을 하지 않는 설교자의 무책임과 게으름이 중요한 원인이다. 그런가하면, 본문 접근과 해석에 대한 잘못된 굳어진 습관에 젖어서 본문을 잘 못 다루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동안 확산되어 온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등이 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설교 자료의 범람이 아이로니컬하게도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의 양산을 촉구하는 역기능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설교준비가 넘치는 설교 자료들을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본문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그렇게 하여 얻은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는 대신, 설교 자료가 제공하는 예화나 주제, 대지 등을 그대로 설교의 내용으로 사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본문이 배제되는 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들의 설교 횟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설교자들로 하여금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를 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 주간에 8-10회 정도의 설교를 감당하면서 모든 설교를 본문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그래서 얻은 내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7) 설교자의 영성 상실
설교자들이 전통적으로 교인들 심지어는 그가 속해있는 사회로부터도 받았던 존경과 신뢰를 지금도 받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현대 한국교회 목회자가 처하여 있는 상황을 살펴볼 때 그 대답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영적 지도자, 영적 스승, 일반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관과 자존심을 갖고 사는 믿을만한 이들,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속하여 있는 지도자 등등으로 지칭되면서, 영적신뢰와 존경을 받거나 최소한 그 인격을 인정받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오히려 불신과 비난을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로 부터도 깊은 영적 신뢰를 확보하고 영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점점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인들의 의식이나 성품이 잘못되어 그럴 수도 있다. 모든 권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 시대 문화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들의 개인영성의 상실 혹은 영성의 피폐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설교자의 영성의 상실 혹은 영성의 피폐화와 설교의 말씀이탈 현상은 악순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본문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를 하다 보니 본인의 영성이 진보할 수가 없고, 설교자의 영성이 피폐화되니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고 그 말씀으로부터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는 것이 악순환 된다. 사실, 설교가 본문에서 이탈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후유증은 설교자 자신에게도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4. 본문 이탈이 초래하는 결과

1) 성도들의 성경 문맹화
역사적으로 성도들의 성경 문맹 현상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중세시대이다. 중세시대에는 사제들만 성경을 소유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법이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설교는 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가와 상관없이 반드시 라틴어로만 행해져야 했다. 라틴어를 읽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사제들도 라틴어로만 설교를 해야 했다. 신도들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가 해주는 말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성경말씀이라고 믿어야 했다. 교회만 성경을 가질 수 있고, 교회가 하는 설교는 성경말씀이라고 믿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시대의 신도들은 실제로 성경에 대하여는 문맹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성경을 신도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성경에 눈이 뜨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언어로 된 성경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자기의 말로 행해지는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성경에 대하여 문맹이 되는 아이로니를 경험하고 있다. 중세교회는 성경말씀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신도들을 성경문맹자들로 만들었다면, 오늘 날은 설교자들이 성경말씀을 말해주지 않아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하여 문맹이 되고 있다.

더욱이 근래에는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문맹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는 성경책 자체가 낯설게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교인이 몇 사람만 모이는 개척교회도 화면에 설교 본문과 설교중 인용하는 모든 성경구절을 띄워주는 것이 보편화 되고 있다. 이것이 주는 유익도 있다. 교인들이 성경을 찾게 하느라 설교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일 없이 성경을 인용하며 설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설교 시간과 예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모든 성경 구절을 화면에 띄워주는 친절함과 편의를 제공하는 과잉친절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점점 성경책이 낯설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화면에 띄워주는 글자만 따라 읽으면 되다보니,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상식을 갖추게 된 경우나, 혹은 교회에서 설교와 별도로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그룹 혹은 성경읽기 그룹에 속하여 훈련을 받는 교인 외에는 성경 어느 책이 어디에 나오는지 순서도 모르고, 앞뒤의 문맥을 알아갈 기회도 없다. 그러나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가 곧 바로 교회의 성경공부 그룹에 참여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배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회심하고 처음 교회출석을 한 이후 오랜 세월을 성경책을 한번 찾아볼 기회도 없고 앞뒤를 살펴볼 기회도 없이 그렇게 교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성경이 낯선 책이 될 것이 확실하다.

2) 성도들의 신앙적인 분별력의 상실
둘째는 성도들이 일상의 삶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즉 신자다운 판단과 행동을 할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되어 신앙의 원리에 따른 신자로서의 처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각각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처신하는 길을 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팎에서 빚어내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은 이미 심각한 상태이다. 성경에는 문맹이라고 할 만큼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일상의 삶과 교회 안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니 매사를 신앙적인 원리와 분별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처신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삶을 위해서는 물론, 목회자의 목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분쟁이 일어날 때 교인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처신하지 않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또한 이단의 유혹이나 공격에 대하여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실례로 근래에 한국교계를 극심하게 어지럽히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성경으로 말한다는 미명 아래 터무니없는 황당한 성경해석을 들이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오히려 그것을 심오한 말씀이라며 쉽게 휘말리고 있다.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성경 본문을 말하는 설교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성경이 교회의 각종 의식에서 사라져감으로써 현대 교회와 성경이 제시하는 원래의 교회와 현실 교회 사이의 연속성이 약화되거나 심지어 단절되어 오늘날의 교회가 원래 교회가 존재하게 하였던 말씀이나 교회의 유일한 존재 목적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가장 절박한 문제라는 Smart의 지적은 현대 교회에 대한 정당한 우려이다.

3) 성도들의 강단에 대한 불만과 불신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고 있을 뿐, 강단 아래 앉아서 설교를 듣는 교인들 가운데는 강단으로부터 방금 낭독된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심한 불만과 강단에 대한 불신이 끓어오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본문 말씀을 낭독하는 것은, 그 말씀을 설교하겠다는 공적인 약속이다. 강단 아래의 교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다린다. 강단 아래의 교인들이 설교자들에게 쏟아내는 불만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설교가 본문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만이고, 둘째는 설교자 자신은 설교한대로 전혀 살지 않는다는 불만, 그리고 셋째는 설교자가 설교한대로 목회하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강단 아래의 신자들은 방금 읽은 그 성경 본문을 설교하는 설교자, 그리고 그의 일상의 삶이 강단의 설교를 배반하지 않고, 강단의 설교가 그의 삶을 조롱하지 않는 설교자를 보고 싶어 한다.

4) 일중독자 양산
넷째는 교회 안에 일중독자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을 충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설교에 실망한 교인들이 자기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며 자구책으로 내리는 결론은 교회의 일을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다. “설교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 다 옳은 말씀이니 한 마디라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설교와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내리는 결론이 열심히 교회의 일에 충성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에서 성경 말씀의 침묵은 교인들로 하여금 급속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부터 교회 자체와 교인 자신들을 섬기는 일로 돌아서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방편이 된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증거가 되기 시작한다.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화에 대한 말씀의 척도가 없어진 교인들은 신앙의 덕목으로서 내세워지는 다양한 방식의 행위 곧 교회의 일을 척도로 자신의 신앙을 검증하고 확인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열심히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일중독자가 되어간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여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않는 설교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결과는 교인들을 일중독자로 내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단에 대한 무방비
성경의 진리를 설교하는 데 실패할 경우 신자들 가운데서 이단이 활개를 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앞에서 교리설교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이미 다루었다.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여기서 다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근래에 한국교회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황당한 본문 해석과 이만희 중심의 어이없는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기존의 정통교회의 교인들이 신천지 이단에 끌려들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천지에서 들은 내용을 가지고 기존의 정통교회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심오하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성경중심적인 설교라고 당당히 주장을 한다. 이렇게 기존의 교인들이 이 이단의 미혹에 쉽사리 빠져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예배와 봉사에 열심히 참석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천지 이단에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데로 가버리는 현실이 정통교회의 설교와 설교자에게 던지는 도전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어느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반성경적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의 개인적인 무책임과 무지함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그동안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어떤 가르침이나 주장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게 하는 설교를 듣지 못하며 교인 생활을 해온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기존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며,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목적을 둔 설교를 소홀히 해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만희가 그렇게 황당한 알레고리 해석과 억지 해석 그리고 말도 안되는 자의적 해석을 일삼는데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정통교회의 신자가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기존 교회 목사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심오한 성경중심 설교라고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기존 교회에서 그러한 알레고리 해석과 자의적 해석 등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5. 창기 한국교회의 성경중심적 성격

한국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4년 이었다. 그러나 한국어 성경 번역은 그 이전에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후에 일본에서도 이루어졌다. 만주에서는 John Ross 와 John McIntyre 가 주도하고,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등 한국인 번역자들이 합세하여 이루어졌다. 1882년에 누가복음 인쇄, 1883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도행전을 인쇄, 1887년에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3천부를 출판하였다. 이것이 바로 “로스 번역본(Ross Version)이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5년초에 미국성서공회에서 천부의 번역판을 인쇄하였다.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한국인 번역자들은 그 이후 성경을 국내에 들여와 보급할 뿐 아니라, 성경 말씀(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1883년에 서상륜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 번역된 복음서 성경을 한국으로 가져왔으며, 1884년에는 6천부를 들여와 여러 지방으로 다니면서 배포하였다.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896~1940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성경은 총 2,062만여권으로 이는 매년 458,255권이 반포된 셈이며, 미국성서공회(ABS) 한국지부가 1901~1919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것은 총 266만권으로 매년 140,455권을 반포한 셈이다. 한국의 성경 반포사업이 그렇게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데는 권서(colporteur)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권서는 성서공회 혹은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는 활동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그것을 보급하고, 그 내용을 전하기에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이들이다. 1940년까지 영국성서공회 한국 지부는 성경보급의 약 85%를 권서들에 의존하였고, 1913~1918년의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성경보급의 약 98%는 권서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찾아온 초대 선교사들은 이미 번역된 복음서를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곧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선교의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 번역과 보급으로 말미암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은 처음부터 자기의 언어로 직접 성경 말씀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며, 교육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경은 한국교회 역사의 첫 순간부터 매우 중요하고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기독교가 성경 중심의 성격을 가진 기독교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곧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이후의 한국교회가 그렇게 지독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렇게 힘찬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성경중심의 그 체질 때문이었다. 성경이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목도한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지칭하곤 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주목하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기독교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성경은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양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 ‘국문공부’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뒤이어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경회 운동은 1903년과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경회는 초기에 선교사와 그 부인들, 한국인 조사와 장로들 및 권서들이 인도하였으나, 뒷날에는 주로 한국인 지도자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사경회를 겸하였다. 1908년 미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만 800여회의 사경회에 5만 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에는 신자들의 60% 정도가 매년 사경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는 압록강 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0리 길을 걸어왔고, 그 이듬해 평양에서 열린 ‘사나이’사경회에는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형제들이 있었다.(<그리스도신문> 6-5호,1902.1.31일자) 1909년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위해 한 자매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왔고, 다른 이들은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은 손때 묻고 닳은 성경책을 갖고 있었다.(H.Miller,”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1909.9.p.263)

이와 같은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은 한말 일제하에서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또한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자랄 수 있는 영적인 토대는 바로 성경이 한국사회에 널리 보급되고 교인들 사이에서 공부되는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교회 초기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성경 중심의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 설교의 본문 이탈현상에 대한 대응책

1) 성경적 설교의 회복
아모스 선지자가 그렇게 처절하게 지적했던 말씀의 기갈은 바로 오늘 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를 두고 한 말씀일런지도 모른다. 성경책은 어디에나 나뒹굴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없는 시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걸머져야 할런지도 모른다. 강단에서의 말씀의 회복과 말씀의 부흥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급선무이다. 성경적 설교란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을 선포하는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을 충분히 드러내어 제시하는 강해 설교가 강단에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문을 청중의 기복적이고 실용성 우선의 개인적 욕구충족을 기준으로 풀어내는 것을 지양하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흐름인 구속사적 혹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원리에 충실하도록 풀어내는 설교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설교의 회복이다.

2) 설교자의 확고한 영성의 확보
설교자가 청중의 요구나 취향에 타협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확고하게 선포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로서 영적 감각과 영적 분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교인들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이 언제나 깊은 영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영성이란 무슨 신비한 능력이나, 혹은 초인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 자신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진력하는 가운데 체득하게 되는 영적 감각과 분별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 날 목회자들이 기도를 내려놓고 기획에 몰두하고, 목회프로그램을 찾아다니느라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헌신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목회자는 목회기술자나 교회 경영자가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이다. 영적인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 필수적이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와 목회자들이 너무 지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영성이 무디어진 것이라며, 지성을 강조하는 것을 폐단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영성과 지성은 대립적인 것도 아니고, 서로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양자택일의 것이 아니다. 영성을 무시한 지성은 무기력하고, 지성을 무시한 영성은 위험할 뿐이다. 우리가 영성이 약한 것은 지성에 너무 힘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들로 너무 바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수행하는 설교자에게 끊임없는 깊은 기도는 단순히 신앙의 덕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설교 준비의 구체적인 방법이며, 능력 있고 효과 있는 설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다. 기도 없이 행하는 모든 사역활동은 결국은 헛것이라는 사실을 설교자는 명심해야 한다.

3) 개인적 말씀 연구 집중
설교자는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의 묵상과 연구는 물론 다음 주일 설교와는 상관없는 말씀 묵상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행하여야 한다. 설교자들이 말씀 연구에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며 전념하는 일을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수행해나가는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목회 현장에서 발생한다. 본업이 아닌 여러 일들에 너무 분주하게 지내는 것이 문제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선정하고 그 우선순위를 유지하는데 결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설교의 말씀 이탈 현상은 설교자가 하나님과 단 둘이서 깊이 있는 만남을 확보하기 위한 깊은 기도와 함께 깊은 말씀 묵상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고 교회의 일들을 중심으로 분주하고 바쁘게 지내는 것을 일상화해버린 데서 온 결과이다. 최근의 예민한 교인들 가운데서는 목회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목회가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면 목회자가 굳이 목사일 필요는 없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도전일 뿐 아니라, 모욕적인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만도 없는 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4) 말씀대로 살아내는 인격
설교자의 영성이란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이란 그 자신이 설교한대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인격을 말한다. 설교자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는 사람이다. 오늘 날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도 설교자들이 존경대신 무시를 당하고, 영적지도자로 신뢰를 받기 보다는 모욕과 조롱을 당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신통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설교한대로 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삶 속에서 설교된 성경 말씀의 결과를 보는 청중들은 설교자의 설교가 청중의 요구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고 성경 말씀을 선포해야 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게 될 것이다. 

5) 초창기 한국교회 사경회의 회복
초기 한국교회의 독특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성경 중심적 기독교”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특성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 바로 사경회였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성경을 읽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문운동을 일으켰으며, 성경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사경회 운동을 열렬하게 진행하였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하여 시작한 사경회는 점점 지역적으로, 계층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작은 도시는 물론 큰 도시에서 나중에는 도 단위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사경회의 지역적 범위가 확장되었다. 사역자들을 위한 사경회, 여성들을 위한 사경회, 젊은이들을 위한 사경회, 선교사 사경회 등으로 계층 집중적 사경회로 확장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경회의 내용에 있어서도 성경뿐만 아니라, 전도 등 사역 등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개론, 예배인도법, 교회사 등 성경 본문에 대한 공부 외에 신학과 신앙 과목도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에 집중하면서 성경 사경회는 심령부흥회로 바뀌는 경향을 띄게 되었고, 성경이 아니라 감정과 축복 중심의 세속적 집회로 변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성경사경회를 회복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나가는 말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어두워진 것이고, 교회가 어두워진 가장 심각한 원인은 강단의 말씀이탈 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강단의 변절이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의 한 가운데 설교자가 있다. 설교자는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설교자가 말씀을 임의로 바꾸어 말하거나, 말씀 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역이다.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을 기다리는 회중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의 사역자인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이다. 설교자의 반역이 오늘 날 강단이 죽은 가장 큰 원인이다.

사실 그동안의 설교들은 말씀에 집착하여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재미있는 설교, 편안한 설교, 축복이 넘치는 설교를 지향해왔다. 교회에 대한 강조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경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주로 일과 봉사 등을 강조하며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 등 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하게 되었다. 신천지 이단의 파장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멀어져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별을 갖추지 못한 신자가 많아진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만희 자신도 신천지가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정통교회의 이 점을 비난한다. “요즘의 교회는 모두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국복음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세상 이야기나 하며 성도의 수를 불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 세상 교회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만희는 이 점을 간파하여 성경해석을 주무기로 들고나오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준다고 속이며 교인들을 미혹한다. 그 전략이 통하여 지금과 같이 큰 파괴력을 한국교회 안에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한, 설교자가 복음을 말해도 그것은 반복음적인 것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복음에 어긋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공격자들이 자신 있게 쏘아대는 화살인데,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쳐낼 방패를 잃어버렸다. 계속하여 성공과 축복과 위로와 격려와 간증,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 등을 설교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근거로 한 심오한 가르침이라면서 다가온 내용들을 놓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하는 그 말이 과연 신자나 교회에 대하여 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설교하고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성경적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

* 각주 생략- 첨부파일에 포함

정창균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설교자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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