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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인으로 읽기 – 상황에서 읽기

한국인으로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의 상황을 의식하고 그 상황을 고려하고 그 상황에 사람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경전으로 읽기에서 우리는 큰 원리를 발견합니다. 용서해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소서. 용서하라는데 제자들이 즉각적으로 나타낸 반응은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아량의 문제나 도량의 문제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는 성경의 의미는 무엇인가? 용서는 어떻게 해서 하는가? 용서는 자기의 인격의 성숙의 결과가 아니고 자기가 도량을 넓혀서 가능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은 불가능하다는 전제입니다. 인간이 용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용서를 한 어떤 샘플을 보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것에 대한 모방으로 가능한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를 말할 때 복음서를 보세요. 사랑을 말할 때 성경을 바라보세요. 그것은 사랑할 사람, 용서해야 될 사람의 인품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로 말합니다. 용서한 본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이다.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을 한 샘플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용서에 대해서 ‘네가 용서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맥락에서 나온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만달란트를 용서 받고, 탕감 받고 가는데 한 달란트 빚진 친구만나서 멱살 잡고 감옥에 넣었다. 그러자 왕이 탕감을 취소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스스로 자비심을 길러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이런 것이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한 샘플이 여기 있다. 바로 예수님. 그 다음에 네가 용서를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용서는 자비심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고 빚 갚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에 대한 당연하고 마땅한 책임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이고 내가 베푸는 자비심이 아니고 일억을 탕감 받은 사람이 천원 안받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경전으로 읽는 것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해야 된다.

한국인으로서 읽어야 된다는 말은 이 문제가 한국 상황에서는 어디에서 걸리고 있는가? 이 문제를 한국 사람이 받아들이고 이런 용서를 하는 데에 한국이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은 용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이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인가? 이것을 이 상황에서 끌어 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 원리를 읽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인으로 읽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context)에서 그 ‘말씀’(text)을, 그 경전을 읽고 그 ‘상황’(context)으로 그 ‘말씀’(text)을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국 사람에게 하는 설교자의 성경읽기입니다.

정창균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설교자하우스 대표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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